기록 9건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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현 부산광역시 영도구의 구 왜관지의 변형된 모습이다.

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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★표는 절영도 왜관지를 표시하며, 우측 해안선은 여전히 모래톱으로 남아있다.

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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Alexandre Theophile Piry(1851-1911)는 프랑스 출신으로 사진촬영에 조예가 깊었고, 1886년 6월부터 1888년 3월까지 약 2년간 부산해관 2대 해관장으로 근무하였다.
그가 1887년 12월에 전관거류지 서쪽(오늘날 신창동 1-2가 일대)을 촬영한 사진과 포산항견취도를 비교해 보아도 그림의 제작연도가 사진촬영 일자와 크게 차이나지 않음을 알 수 있다.
이를통해 초량왜관시대 서관 동대청, 중대청, 서대청 건물이 정확하게 보이며, 6행랑 중에서 2채는 이미 철거되고 4채는 지붕이 보인다. 포산항견취도에는 6행랑 중 북쪽 1채가 없는 5채가 묘사되어 있으니, 이 사진에서는 다시 1채가 철거되어 일본인 주택지로 변한 것을 확인할 수가 있다.

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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이 그림은 18세기경 대마도 화공이 그린 초량왜관도로, 이와 유사한 것이 여러점 전해오고 있다. 용두산을 중심으로 서쪽에는 3대청과 6행랑을 묘사되어 있으며, 그 위 쪽 나무가 무성한 숲으로 그려져 있는 것이 현재의 국제시장일대이다.

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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초령회지도라고 이름이 붙어 있는 이 지도는 1678년(숙종 4년) 두모포왜관을 오늘날 용두산공원 일대인 초령목으로 이전하기 위해서 동래부사와 대마도 왜관수 사이에 신설할 왜관의 경계선을 측령하고 작성한 것으로 초량왜관지는 처음 동서가 450間, 남북이 250間이었음을 알 수가 있다. 절영도는 목도, 용미산은 호사키산으로 기재되어 있으며 용두산도 표시되어 있는데 초령왜관은 용두산을 중심으로 형성하고 있다. 현재 보수턴을 중심으로 한 평지는 샛띠벌(구초량) 주민들이 마을을 형성해서 살았음을 알 수가 있으며, 경계선 내에 들어있던 주민가옥 數十間은 왜관 경계가 확정됨에 따라 경계선 밖으로 이주시켰음을 이 지도를 통해서 알 수가 있다. 원본은 대마도 宗立入씨가 선대로부터 물려 받아 오랫동안 소장하고 있던 것을…

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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사진 좌측 하단의 3층 건물이 부산 상품전시관 건물로, 용두산에서 바라 본 현재의 국제시장 일대이다. 부평동 해안 일대에 주택이 많아진 것으로 보아 1920녀내 후반으로 추정된다. 김재승 『기록사진으로 보는 부산ㆍ부산항 130년 』

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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사진 아래의 건물은 현재 광일초등학교이다. 김재승 『기록사진으로 보는 부산ㆍ부산항 130년 』

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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촬영장소는 현재 로얄호텔 앞 대로변. 부산포에서 일본인 상주지가 증가하여 도심지가 확장되자 1888년 6월 이 개천은 매립되기 시작하며, 현재 광복동 깅은 이 개천을 메워 만든 것이다.

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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벤턴죠라고 부르는 일본인 거리로 지금의 광복동. 거리 한가운데는 야나카와라 부르는 개천이 흐르고 멀리 보이는 산이 절영도의 봉래산. 이 개천에는 15개의 나무다리가 있어 건너 다녔다.